[시승기] 혼다 파일럿, 인심 넉넉한 아버지의 SUV
[시승기] 혼다 파일럿, 인심 넉넉한 아버지의 SUV
  • 이재욱 에디터
  • 승인 2017.03.30 02:49
  • 조회수 3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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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는 퍼스널 카의 성격이 강한 소형 SUV의 인기가 높지만, SUV의 본질은 '가족'이다. 가족과의 여행을 위해 세단보다 짐 싣기가 편한 왜건이 등장했고, 왜건을 보다 편하게 운전하기 위해 만들어진게 SUV다. 그러니 결국 SUV의 탄생에는 가족을 더 편하고 쾌적한 차에 태우고자 하는 아버지의 마음이 담겨 있다.

혼다 파일럿은 그런 관점에서 볼 때 10점 만점 아버지다. 일본 브랜드 뱃지를 달고 있지만 미국에서 개발되고 생산된 미국을 위한 SUV다. 때문에 미국차의 풍요로움과 여유가 가득하지만 동시에 일본차 특유의 꼼꼼한 만듦새가 돋보인다. 너그러우면서도 가족을 알뜰살뜰 챙기는 아버지의 모습이 겹쳐 보인다.



혼다 파일럿은 2003년 처음 출시됐다. 늘어나는 북미 SUV 수요에 대응하기 위한 북미 전략 모델이다. 때문에 정작 일본 시장에서는 파일럿을 만날 수 없다. 우리나라에는 2세대가 처음 소개된 뒤 지난해 모델체인지를 거쳐 현재는 3세대가 판매 중이다. 워낙 집채만한 차가 많은 미국에서는 파일럿이 중형 SUV지만, 한국에서는 대형 SUV로 구분된다.

2세대 파일럿은 믿음직스럽지만 투박했다. 각진 외관은 나이 들어보이기 원치 않는 소비자들을 망설이게 했다. 레저를 즐기는 캠핑족 사이에서는 차 좋기로 입소문이 났지만 선뜻 마음이 가지 않았다.



하지만 풀체인지를 거치며 파일럿은 훨씬 세련되게 변했다. 혼다의 최신 디자인 언어를 받아들여 램프 디자인을 날렵하게 다듬고 공력성능도 20%나 향상됐다. 감각적이면서도 웅장하고, 현대적이지만 오래 봐도 질리지 않는다.

전장*전폭*전고는 4955*1995*1775(mm)로 매우 넉넉한 크기다. 이전 세대보다 전장은 80mm나 늘어난 반면 전고가 65mm 낮아져 훨씬 안정적인 비례감이 됐다. 라이벌인 포드 익스플로러와 비교하면 전장은 조금 짧지만 전폭과 전고는 같다.



LED 헤드라이트와 DRL, LED 테일램프가 적용돼 한결 고급스러운 분위기를 풍긴다. 동급 유일의 20인치 알로이 휠은 덤. 매우 큰 몸집에도 권위적이거나 부담스럽지 않고 정제된 이미지다. 이전 세대가 '아재' 느낌이라면 이제는 슬림핏 수트에 머리를 빗어넘긴 댄디남 같달까. 보다 젊은 운전자가 타도 부담스럽지 않다.



실내는 최신 혼다 모델답게 차분하고 조작하기 쉽게 정리됐다. 센터페시아는 지나치게 트렌디하지 않고 심플한 배치다. 자주 조작하는 공조장치 버튼은 따로 배치하고 오디오, 전화 등은 터치식 디스플레이에 집어넣었다. 정전식 터치 방식의 8인치 디스플레이는 터치 감도가 좋고 한글화도 잘 이뤄졌다. 아이폰을 쓴다면 애플 카플레이도 사용할 수 있다.



센터 콘솔의 설계가 특이하다. 많은 차들이 위로 여닫는 센터 콘솔을 채택하고 암레스트 겸용으로 설계하지만, 파일럿은 깊숙한 미닫이식 센터 콘솔을 채택해 팔걸이를 내린 상태에서도 쉽게 물건을 꺼낼 수 있다. 사소한 부분까지 사용자의 입장을 고려한 설계다.



많은 대형 SUV들이 5인승 또는 7인승으로 수입되지만 파일럿은 동급에서 유일한 8인승 SUV다. 2열에 3명, 3열에 3명이 앉을 수 있다-물론 3열에 어른 셋이 넉넉히 앉기는 힘들다.

평소에는 넉넉한 공간의 5인승 차량으로 많이 사용되겠지만, 필요할 때 3명을 더 태울 수 있다는 건 큰 메리트다. 평소에 자주 안 쓰는 것과 애초부터 불가능한 것은 차원이 다르다. 갑작스럽게 여러 사람이 타거나 대가족이 함께 여행을 갈 때 유용하다.



특히나 3열이 단순한 구색갖추기용이 아니라는 점이 마음에 든다. 2열 시트에 전동식 워크인 스위치까지 달려 있어 타고 내릴 때 모양 빠지지도 않는다. 우아하게 버튼 하나만 누르고 올라타면 그만이다. 뒷좌석을 위한 독립 공조 시스템도 탑재된다.



3열 시트를 접으면 평소에도 1325L나 되는 적재공간이 생긴다. 웬만한 중형 SUV들이 2열 시트를 접은 것과 맞먹는 넓이다. 2열 시트까지 접으면 2376L로 늘어난다. 만약 8명이 타면? 그래도 걱정 없다. 기본 트렁크 용량이 일반 세단과 비슷한 467L에 이르고 바닥의 숨겨진 공간을 활용하면 유모차나 아이스박스처럼 부피가 큰 짐도 쉽게 실을 수 있다.

이렇게 크고 여유로운 차를 탄다면 당장 어디든 떠나야 한다. 파일럿과 조금 친해진 뒤 바로 해변으로 향했다. 함께 떠날 가족은 없지만 혼자서라도 여행 기분을 내 보고 싶었던 까닭이다.



한국 SUV 시장은 디젤이 강세다. 시장의 주류인 국산·독일산 SUV들은 대다수가 디젤이다. 하지만 요즘은 가솔린도 나쁘지 않은 대안이다. 조용하고 부드러워 장거리 여행에도 스트레스가 적다. 유가 상승세도 주춤해 매일 통근용으로 쓰지 않는다면 그렇게 부담스럽지도 않다. 국산 브랜드들도 이런 추세에 편승해 앞다퉈 가솔린 SUV를 출시하고 있다.

파일럿의 심장은 어코드 3.5와 같은 3.5L V6 자연흡기 가솔린 엔진이다. 구형과 배기량은 같지만 최고출력은 10% 가량 높아진 284마력, 최대토크는 36.2kg.m에 달한다. 덕분에 공차중량이 2톤에 육박하지만 힘이 부족한 느낌을 받을 수 없다. 게다가 출력과 동시에 공인연비까지 개선됐으니 과연 기술의 혼다다.



가속 페달을 밟으면 거대한 차체가 마치 은반 위를 미끄러지듯 부드럽게 출발한다. 몸집이 무색하게 기민한 반응성을 느낄 수 있다. 디젤 SUV에서는 느낄 수 없는 자연흡기 가솔린만의 감각이다. 변속기는 보수적인 6속 토크컨버터로 락업 클러치 작동이 빠르지 않아 부드러움에 초점을 맞춘 세팅이다.



혹자의 표현처럼 파일럿의 주행감각은 자동차가 아닌 배를 모는 느낌이다. 함교에서 키를 잡고 대양을 바라보는 선장처럼, 높고 탁 트인 시야로 온 도로를 내려다보며 여유롭게 크루징을 즐기기에 적합하다. 가솔린 엔진은 정차 중 시동이 꺼졌나 착각할 정도로 조용하고 부드럽다. 어느 길에서도 스트레스가 없다. 몸집이 크다고 걱정할 필요는 없다. 전·후방 시야가 준수하고 차선 변경 시에는 카메라로 사각지대를 확인해 주는 레인와치 기능도 탑재됐다.

한 없이 차분하지만 원할 때는 언제든 박차고 나갈 준비가 돼 있다. 별도의 스포츠 모드는 없지만 시프트 노브의 D4 버튼을 누르면 5, 6단을 사용하지 않아 가속력이 향상된다. 크고 무거운 차체 때문에 폭발적인 가속은 아니지만 순풍에 돛 단 듯 지치지 않고 속도를 낸다. 고속도로 추월 가속에 전혀 스트레스가 없다.



서스펜션은 스포츠 주행을 논할 타입은 아니지만 부드러우면서도 거대한 차체를 휘청임 없이 지지한다. 어린 자녀를 태워도, 혹은 부모님을 모셔도 불편하거나 울렁이지 않는다. 부드러움과 탄탄함이 공존하는 지극히 혼다 다운 세팅이다. 누구에게나 사랑받을 준비가 돼 있다.



온로드 주행을 지향하는 패밀리 SUV지만 필요할 때는 오프로드 주행에도 망설임이 없다. 똘똘한 전자제어식 4륜구동 시스템이 평소에는 앞바퀴에 구동력을 전달하다가 필요할 때 전후는 물론 좌우 구동력 배분까지 구현해 어떤 노면에서도 안정적인 주행성능을 선보인다. 퍼포먼스는 물론 악천후 상황에서의 주행 안전에도 중요한 요소다.

안전 이야기가 나왔으니 덧붙이자면 파일럿의 안전도는 동급 최고 수준이다. 이미 IIHS 충돌 테스트에서 스몰 오버랩을 비롯한 전 영역 고른 점수를 받아 탑 세이프티 픽+로 선정됐다. 우수한 차체 강성 뿐 아니라 차선유지보조(LKAS), 어댑티브 크루즈 컨트롤(ACC), 추돌경감제동(CMBS) 등 첨단 능동 안전 기능이 대거 투입됐다. 이러한 안전 사양 역시 동급 최고다.



물론 파일럿이 매일 시내로 출퇴근하기에 적합한 차는 아니다. 비좁은 도심에 주차하기도 만만치 않고 몸집 만큼이나 먹성도 좋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매일 탈 차를 찾는 건 아니다. 주말에 가족과 함께 근교로 떠나기에 파일럿은 더 없이 좋은 파트너다.

필자는 미혼이다. 아직 배우자도, 자녀도 없다. 하지만 파일럿을 탈 때만큼은 아버지의 마음이 된다. 대단히 화려하지는 않아도 묵묵히 식구들을 챙기는 아버지같은 차가 바로 파일럿이다. 풍요롭고 실용적이며 기본기와 안전에도 충실하다. 짜릿함보다는 안도감이 느껴지는 자동차다.



파일럿에게는 깊은 산 속 오지로 떠나는 캠핑보다는 카라반을 끌고 아름다운 호숫가에서 가족과 뛰노는 글램핑이 어울린다. 언젠가 아버지가 됐을 때 닮고 싶은 넉넉한 인심, 그것이 파일럿의 가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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