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상자 속 1000cc 경차의 고민: 비관세장벽인가, 합당한 규격인가
[칼럼] 상자 속 1000cc 경차의 고민: 비관세장벽인가, 합당한 규격인가
  • 이재욱 에디터
  • 승인 2017.06.12 15:07
  • 조회수 68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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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1.6×2.0’ 자동차관리법 시행규칙 별표1에 명시된 우리나라 경차 규격이다. 전장 3.6m, 전폭 1.6m, 전고 2.0m 이내의 크기에 1000cc 미만 배기량의 엔진이 얹혀야만 대한민국에서 경차로 인정받고 많은 혜택을 누릴 수 있다. 그런데 경차 크기를 키워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또 이에 맞서는 의견도 적지 않다. 작은 상자 속 경차는 왜 논쟁거리가 됐는가?

‘경차’의 규격을 처음 만든 건 일본이다. 2차 대전이 끝난 뒤 1949년, 전쟁으로 모든 걸 잃은 일본인들은 중형차를 살 여력이 없었다. 국민들이 자동차를 살 능력이 없으니 자동차 회사들의 경영난도 심해졌다. 이에 일본 정부는 내수 자동차 산업을 육성하고 서민들이 저렴한 가격에 실용적인 자동차를 구입해 상공업을 활성화하기 위해 1949년 경자동차 규격을 신설했다.



최초의 일본 경차 규격은 전장 2.8m에 전폭 1m, 배기량은 150cc에 불과해 사실 상 네 바퀴 달린 오토바이나 다름없었다. 전고는 처음부터 지금과 같은 2m로 제한됐다. 이후 일본 자동차 산업이 성장하면서 경차 규격은 서서히 확장돼 왔고, 일본만의 특별한 경차 문화가 자리 잡게 됐다. 경차의 가장 큰 메리트는 연비도 좋지만 각종 세금 혜택을 받을 수 있다는 점이다. 또 까다로운 차고지 증명이 필요한 일본에서 증명을 면제받는 경차는 국민적인 사랑을 독차지했다. 현재 일본의 경차 비율은 35~40%에 육박한다.

뒤늦게 산업화의 불을 지핀 한국 정부도 이런 일본의 경차 법제를 예의주시했다. 1973년과 1978년 두 차례의 오일쇼크로 국가 차원의 에너지 절감 정책이 요구됐고, 이는 80년대 중후반 마이카 열풍과 맞물리며 작고 효율적인 국민차 보급에 대한 논의로 이어졌다. 이윽고 1991년 대우국민차가 티코를 출시하며 한국에도 경차 시대가 열렸다.

최초 한국 경차의 규격은 전장 3.5m, 전폭 1.5m에 전고 2m, 배기량은 800cc로 일본 경차보다 크고 엔진 출력도 높게 만들어졌다. 국민차로 보급되는 만큼 좀 더 넓은 공간이 필요하고 산악지형에 걸맞게 힘도 세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그런데 이 규격은 얼마 뒤인 2003년 다시 논쟁거리가 됐다. IMF 사태가 어느 정도 진정세로 돌아서면서 경차 시장도 위축됐기 때문이다. 소비자들은 경제 위기를 넘자마자 경차를 등한시했고, 한때 35%에 육박했던 경차의 점유율은 2003년 11월 4.3%까지 떨어졌다.



이에 정부는 경차를 더 넓고 더 힘 좋게 만들어 판매를 촉진하기 위해 경차의 규격을 전장 3.6m, 전폭 1.6m, 전고 2m에 배기량 1000cc로 상향조정한다. 또 2004년부터는 경차의 특별소비세와 등록세 및 취득세를 면제하고 책임보험료 10% 할인, 고속도로 및 유료도로 통행료 50% 할인, 공영주차장 50% 할인 및 자동차 10부제 제외 등 경차 지원책이 도입돼 오늘에 이른다. 이처럼 한국 시장의 경차 규격과 지원 정책은 꾸준히 변화해 왔다.

이전 경차 규격의 변화 논의는 국내 제조사들의 알력다툼에서 이뤄졌다. 80년대 최초 경차 규격 선정 당시 대우중공업과 현대차 및 기아차가 각자의 개발 사정에 따라 목소리를 냈고, 2003년 경차 크기를 키울 때도 1000cc 엔진을 도입하고자 했던 현대기아차와 1000cc 엔진이 없었던 GM대우의 신경전이 벌어졌다. 결국 새 규격의 도입을 2008년까지 유예시킨 것도 GM대우의 로비가 주효했다.

그런데 최근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른 경차 규격 논쟁은 수입차 업계에서 나왔다. 성장일로를 걷고 있는 수입차 업계는 한국 시장에 더 작은 차를 팔고 싶어 한다. 국내에서 생산되는 경차들이 생산비용과 수익성을 따져야 하는 것과 달리 수입차 업체들은 브랜드 파워에 힘입어 소형차에 더 비싼 가격을 매길 수 있다. 이미 소형차 시장까지 넓어진 수입차의 저변을 경차까지도 넓히고 싶은 것이다.



문제가 되는 건 유럽차다. 유럽에서 경차는 A-세그먼트에 해당한다. 대표적인 모델이 폴크스바겐 업(Up!), 푸조 108, 피아트 500, 스마트 포투, 르노 트윙고 등이다. 특히나 소형차 개발역량이 뛰어난 유럽 대중차 브랜드들은 이 시장에서 상당한 경쟁력을 지녔다.

문제는 한국이나 일본과 달리 유럽 시장에는 각 세그먼트에 대한 구체적인 규격이 없다는 점. 유럽연합 집행위원회(European Commission)가 자동차의 차급에 대한 세그먼트 구분을 규정하기는 했지만 각 나라마다 교통 환경이 다를뿐더러 A-세그먼트에 대한 별다른 혜택도 없는 유럽 시장에서는 별도의 규격을 제정할 필요성이 적다. 때문에 일반적으로 A-세그먼트 자동차가 한국의 경차와 비슷한 크기지만 세부 제원에서 차이가 난다.

가령 피아트 500은 전장이 3550mm에 불과해 기아 모닝이나 쉐보레 스파크보다 짧지만, 전폭이 1640mm로 경차 규격을 40mm 초과한다. 3m도 되지 않는 차체에 1000cc 엔진이 탑재된 스마트 포투도 2세대까지는 경차 규격을 충족해 몇 안 되는 유럽산 경차로 컬트적 인기를 끌었지만 3세대에 전폭이 1660mm로 늘어나 경차 혜택을 받지 못하게 됐다. 경쟁력 있는 소형차 라인업을 갖춘 수입차 업체들 사이에서 볼멘소리가 나오는 이유다.

이들은 경차 규격, 특히 전폭 규격을 완화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대부분의 유럽 A-세그먼트 모델들이 전장 규격을 충족하지만 전폭이 넓은 특성을 반영해 전폭 규격을 1.7m까지 확대하자는 것이다. 혹은 국산 경차만 충족할 수 있는 규격에 과도한 혜택을 제공하는 현행 경차 지원책을 감축해 수입 A-세그먼트 모델들이 공정하게 경쟁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도 입을 모은다.



특히 2012년과 2015년 각각 발효된 한-미 FTA와 한-EU FTA의 협정내용에 반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현재 한국 문을 두드리는 A-세그먼트 차량들은 대부분 미국이나 유럽에서 생산된다. FTA 이전 만들어진 경차 규격과 경차 지원책이 사실 상 동급인 A-세그먼트 모델들에는 반영되지 않는 건 비관세장벽이자 FTA의 호혜평등 원칙에 반한다는 것이다.

규격 완화 찬성론자들은 경차 규격이 확대됨으로써 여러 수입 경차들이 한국 시장에 투입되면 소비자의 선택권이 넓어질 뿐 아니라 국산 경차와 수입 경차의 경쟁을 유발해 궁극적으로는 국산 경차의 경쟁력도 높아질 것이라고 주장한다. 결과적으로 작고 실용적인 경차가 새로운 시장을 개척해 자동차 업계 전체가 윈-윈(win-win)할 수 있다는 것.

그러나 이에 대한 반대의 목소리도 적지 않다. 경차 규격은 그 나라의 도로와 주차 환경, 산업 및 경제 상황 등을 반영해 결정된다. 현재의 경차 규격에 대해 소비자와 제조사 모두 변경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상황에서 일부 수입차 업체의 요구로 무작정 규격을 완화할 수는 없다는 것. 더구나 이러한 법규의 개정을 통해 다수 국민의 이익이 커질 거라는 주장에 대해서도 부정적이다.



반대론자들은 일본 경차 시장을 예로 든다. 현행 일본 경차 규격은 우리나라보다도 작은 전장 3.4m, 전폭 1.48m다. 심지어 배기량은 660cc에 64마력이라는 출력 제한까지 있다. 이는 일본 교통 환경을 반영한 규격일 뿐 비관세 장벽으로 볼 수 없다는 것. 오히려 연간 170만대 규모의 시장에 들어가기 위해 수입차들이 몸집을 줄인다. 지난 2014년, 영국의 경량 스포츠카 메이커 케이터햄은 자사의 대표 스포츠카 세븐의 전장과 전폭을 줄이고 660cc 64마력 엔진을 얹은 세븐 130을 일본에 출시했다. 이 초소형 스포츠카는 오직 일본의 경차 규격을 충족시키기 위해 탄생했다. 요컨대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판다’는 것이다.

쉐보레 스파크 역시 북미형은 전장이 3635mm에 달한다. 내수형은 경차 규격에 맞추기 위해 길이를 줄였다. 이처럼 경차 규격은 배출가스나 안전 법규와 마찬가지로 국내 시장의 하나의 특성일 뿐이다. 규격 외 차량을 임의로 판매할 수 없도록 하는 것도 아닌 만큼 이를 비관세장벽으로 해석하거나 다른 차의 수입을 위해 완화해달라고 하는 건 작고 경제적인 차를 저렴한 가격에 보급하겠다는 경차 제도의 취지에도 반한다는 게 반대론자들의 주장이다.



물론 작금의 자동차 업계에서 개방과 자유경쟁을 떼 놓고 이야기할 수는 없다. 수입차의 가격 인하는 내수 시장에서 수입차 판매를 촉진했고, 이는 국산차 업계의 위기의식으로 이어져 국산차의 제품과 서비스 품질이 개선되고 있다. 그런 상황을 고려했을 때 경차 규격의 완화를 단순히 판매 볼륨을 늘리고 싶은 수입차 업계의 투정으로만 치부할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A-세그먼트 모델들은 국산 경차와는 다른 경쟁력을 지닌다. 경차 시장의 고급화와 프리미엄화를 이끌 수 있을 뿐 아니라 아직까지 국내 미개척 시장인 디젤 경차 등의 도입을 통해 경차 시장 성장의 발판이 될 수 있다.

더구나 시장의 상황도 많이 바뀌었다. 결정적으로 무역시장에 FTA라는 거대한 변화가 도래한 만큼 이전에 만들어진 법규에 대한 재검토가 필요한 시점이다. 규격 완화를 외치는 목소리를 외면하다가는 국제 통상 분쟁으로 비화될 여지도 있다.

하지만 그러한 규제 완화가 실질적으로 어떤 이익을 가져올 수 있는 지 고민해봐야 한다. 결국 차체 크기는 운전자의 거주성 뿐 아니라 안전과도 직결되는 문제다. 현행 제도 내에서도 경차의 안전성은 업계 평균을 충족하고 있어 안전을 위한다는 핑계로 규격을 키우기도 어렵다.

“고작 몇 mm 차이로 혜택을 못 받는 건 너무하니 봐주자”는 식의 접근도 지양해야 한다. 만일 일부 차종의 판매를 위해 쉽게 경차 규격을 완화하면 이런 논쟁은 더 큰 차가 등장할 때마다 끊임없이 반복될 것이다. 관계당국은 경차 규격과 지원 제도의 취지에 대해 신중히 검토하고, 사회적 합의 과정을 거쳐 규격의 개정 여부를 결정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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