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국산 경차, 변화를 생각할 때: 더 이상 서민차가 아니다
[칼럼] 국산 경차, 변화를 생각할 때: 더 이상 서민차가 아니다
  • 이재욱 에디터
  • 승인 2017.06.22 10:30
  • 조회수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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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카 열풍이 한창이던 90년대 초반, 대우 티코가 출시되며 우리나라의 경차 시장이 태동했다. 이후 한국 경차 시장은 티코-마티즈-스파크의 전통을 자랑하는 한국GM과 비스토-모닝으로 이어지는 기아차의 양자대결 체제로 굳어진 채 20년이 흘렀다. 이제는 변화를 생각해야 할 때다.

2016년 한국에서 팔린 경차는 전기차를 제외하고 18만4050대에 달한다. 상용차를 빼도 그 규모는 연간 17만대 이상으로, 국산차 전체 판매 중 경차의 비율은 12%에 육박한다. 폭발적인 성장세로 주목받는 연간 12만대 규모의 소형 SUV 시장과 비교해도 상당히 큰 시장이다.

경차의 가장 큰 메리트는 경제성과 실속이다. 작고 가벼운 차체 덕에 뛰어난 연비를 자랑할 뿐 아니라 해치백 형태로 적재 능력도 좋고 좁은 골목길에서 운전하기도 편하다. 그러나 이처럼 현실적인 요소들이 강조된 건 경차에게 양날의 검이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경차는 시쳇말로 ‘없어서 타는 차’라는 인식이 강했다. 대우 마티즈가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것도 1997년 IMF 사태로 중산층이 붕괴하던 시기다. 특히나 자동차가 생필품이 아닌 재산이자 신분의 상징으로 여겨져 온 한국 시장에서, 작고 경제적인 차는 서민차 신분을 벗어날 수 없었다.



이런 편견이 무너진 건 2010년대에 들어서다. 2009년 3세대 마티즈와 2011년 2세대 모닝이 출시되면서 경차에 고급화 바람이 불었다. 안전성을 크게 높이고 고급차에 사용되던 편의사양이 대거 경차에도 투입된 것. 2011년 말 박스카 형태의 기아 레이가 출시되면서 경차 붐에 힘을 보탰다. 국산 경차의 패러다임이 ‘작고 경제적인 차’에서 ‘작지만 안전하고 편한 차’로 바뀌기 시작한 것도 이때쯤이다. 특히 차량 구매연령 하락과 맞물려 생애 첫 차로 경차를 선택하는 20~30대 운전자가 크게 늘었다. 바야흐로 경차의 전성기가 시작된 셈이다.

2015년 출시된 쉐보레 스파크는 경차의 평균을 한 단계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전 세대에 없었던 오토 에어컨과 열선 스티어링 휠 등 편의사양은 물론, 크루즈 컨트롤과 후방 카메라 등 상급 모델 뺨치는 옵션을 탑재했다. 뿐만 아니라 고장력/초고장력강판 비율을 72%까지 끌어올리고 북미 스몰오버랩 충돌테스트에도 대응할 수 있는 차체 구조를 갖춘 것으로 알려졌다. 짧고 껑충한 기성 경차와 달리 날렵한 비례까지 갖춰 2016년에는 경차 시장 1위를 탈환했다.



이에 대항하는 기아 모닝의 반격도 만만치 않다. 공격적인 할인과 사은품 공세로 끝물 활약을 보여줬던 모닝은 2017년 초 풀체인지를 거쳐 경쟁력을 크게 높였다. 3세대 모닝은 기존 스타일링을 계승하면서도 더 강렬한 이미지를 주는 디자인이 특징. 여기에 초고장력강판 비율을 기존대비 2배가량 높은 44%까지 늘리고 긴급 제동 시스템, 운전석 무릎 에어백 등 경차 최초 안전사양을 탑재했다. 또 조향 연동식 후방 카메라와 브레이크 기반 토크벡터링 등 신규 사양을 탑재해 주행 편의성과 퍼포먼스를 강화했다. 2017년 4월에는 가솔린 터보와 LPI를 추가해 라인업 선택지를 확대하는 등 스파크와의 정면대결에 나섰다.

이처럼 현재 우리나라의 경차 업계는 어느 정도 고급화 수준에 들어섰다. 최신 경차들은 열선 시트나 블루투스 오디오 같은 기본적인 편의사양은 물론 전방 충돌 경보 시스템, 능동형 긴급 제동 시스템, 차선 이탈 보조 시스템 등 안전사양도 두루 갖췄다. 또 이전 중형차와 맞먹는 수준의 충돌안전성을 확보하고 여러 개의 에어백을 장착하는 등 국산 경차의 수준도 나날이 높아지고 있는 실정이다.

그에 수반해 가격도 많이 올랐다. 기본형 모델은 900만원대에 포진하지만, 최상위 트림에 선택사양을 모두 집어넣은, 소위 ‘풀옵션’ 차의 가격은 훌쩍 뛴다. 2017년 5월 기준으로 기아 모닝의 경우 프레스티지 트림에 선택사양을 모두 추가하면 차량 가격은 할인 전 1660만원까지 치솟고, 쉐보레 스파크 역시 비슷한 수준인 1675만원에 달한다. 기아 모닝과 레이는 성능이 더 뛰어난 터보 라인업을 지녔는데, 이들은 1700만원대 후반의 가격으로 준중형 세단과 맞먹는다. 이처럼 높아지는 가격 부담은 경차 점유율 상승의 걸림돌이다.



한정된 선택지도 성장을 둔화시키는 요인이다. 연간 12만 대 규모의 소형 SUV 시장에는 국산 5종, 수입 6종 등 11종의 모델이 판매 중이며 하반기에는 현대차와 기아차가 각각 1종씩 신차를 추가해 다양한 모델들의 각축전이 벌어질 전망이다. 반면 경차 시장은 연간 17만 대 규모에도 스파크와 모닝이 90%가량을 양분하고 레이가 10%가량 점유율을 확보한 형국이다. 꾸준히 적잖은 수요가 존재하는 시장인 데 비하면 라인업 다변화에는 매우 소극적인 모습이다.

물론 경차 라인업 확장에는 분명한 한계가 존재한다. 당장 수익성이 문제다. 경차는 엔트리 모델이자, 여전히 많은 소비자들이 경제성을 중요한 고려요소로 여기는 만큼 합리적인 가격정책이 필수적이다. 그러다보니 판매 볼륨은 크지만 대형차에 비해 수익성이 떨어져 개발비를 회수하기도 빠듯하다는 설명이다. 일반적으로 소형차일수록 모델체인지 주기가 빠른데, 경쟁상대도 제한적이고 수익성도 떨어지다보니 경차의 변화가 느린 것.

두 모델의 양강 구도가 굳어지면서 출혈성 치킨게임이 계속되는 것도 시장 추이에 악영향을 미친다. 지난해 재고 판매를 이어가려는 기아차와 판매 볼륨을 늘리려는 쉐보레는 가격이 1000만원 남짓인 경차를 구입하면 100만원 상당의 가전제품을 사은품으로 제공하는 등 소모적인 사은품 경쟁을 벌였다. 단기적으로는 소비자가 좋은 조건에 차를 살 수 있지만, 장기적으로 봤을 땐 경차의 수익성을 악화시키고 정상적인 경쟁을 방해해 제품 개발보다는 불필요한 과잉경쟁에 몰두하게 만든다. 두 브랜드가 상대방을 시장의 동반자이자 협력자로 여기지 않고 말려 죽여야 할 적으로만 보면서 발생한 부작용이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 경차가 하나의 온전한 세그먼트로 자리잡고 성장세를 이어나가기 위해 필요한 건 경차 제품의 다변화와 프리미엄화다. 경차의 주 소비층은 20~30대에서 점점 중장년층으로 옮겨가는 추세다. 고령화·저성장의 여파로 합리적이고 운전하기 편리하며 실용적인 경차의 수요가 늘어나는 것. 한때는 크고 고급스러운 차가 부와 성공의 상징이었다면 이제는 필요에 따라 차를 선택하는 풍조가 우리나라에도 확산되고 있다.

이런 가운데 경차 역시 변해야 한다. 개성을 중시하는 젊은 소비자들을 위해 모듈러 플랫폼 기반으로 다양한 수요에 대응할 경차 라인업을 확충하는 한편, 구매력 있는 중장년층 소비자의 취향에 맞춰 더 고급스러운 소재와 우수한 안전 및 편의사양을 갖추는 등 공격적인 변화가 요구된다. 일본 직수입 경차나 유럽 A-세그먼트 소형차를, 여러 패널티를 감수하고라도 구입하는 새로운 소비자들을 단순히 독특한 취향으로만 여길 게 아니라 앞으로 떠오르는 신흥 시장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일반적인 중형차 판매가 줄어들 대로 줄어든 일본 내수 시장은 이미 10년 전 경차가 장악했다. 지난해 일본 내수시장에서 경차의 비율은 자그마치 35%다. 이 마저도 40%가 넘던 게 줄어든 것이다. 경제성과 실용성만으로 선택하는 시대를 지나 개성 있는 스타일과 프리미엄 사양으로 무장해 얼어붙은 소비심리를 파고든다. 일본보다 경차 규격이 훨씬 여유로운 우리나라에서도 얼마든지 가능한 변화다.

물론 일본과 우리나라는 시장구조가 다르다. 일본은 내수전용 모델만으로도 수익성을 확보할 수 있지만 내수 시장 규모가 일본의 절반도 안 되는 한국에서는 수출을 고려할 수밖에 없다. 더구나 경차급 소형차가 잘 팔리는 시장도 제한적이다. 그러나 이미 모닝 플랫폼을 유용해 내수전용 모델로 개발된 레이처럼 좋은 선례가 있는 만큼, 내수 시장에서의 고부가가치 창출을 위해 저비용으로 개발 가능한 틈새 모델들을 충분히 선보일 수 있다.



가령 지난해 북미에 출시된 쉐보레 스파크 액티브는 한국 시장에서도 충분히 경쟁력을 얻을 수 있다. 스파크 액티브는 스파크를 기반으로 지상고를 살짝 높이고 크로스오버 분위기로 꾸민 차다. 일반 스파크보다 3000달러나 비싸지만 북미에서는 스타일과 콘셉트 모두 호평받고 있다. 이미 크로스오버 경차에 대한 관심은 스즈키 허슬러의 인기에서 증명된 만큼, 한국에 출시된다면 소형 SUV 열풍을 경차까지 확대해 초소형 SUV 트렌드를 선도할 잠재력이 충분하다.

기아차 역시 모닝의 모듈러 플랫폼을 활용해 라인업 확장을 도모해볼 수 있다. 최근 기아는 스팅어와 ‘GT’ 라인업을 앞세워 보다 스포티한 브랜드 이미지를 확립하고자 애쓴다. 누구나 접근할 수 있는 경형 플랫폼에 그간 쌓아 온 스포츠 노하우를 더해 경형 스포츠카를 만든다면 마다할 사람이 있을까? 게다가 경차 출력제한이 없는 한국에서 최적의 조합이 될 세 자릿수 출력의 1.0L 터보 엔진까지 이미 마련돼 있다. 경차는 무조건 효율적이고 실용적이어야 한다는 경직된 사고방식을 과감히 버려야 한다.

혹은 내수 의존도가 절대적인 쌍용차에서 티볼리의 동생 격인 SUV형 경차를 만들면 어떨까? 경차 개발은 상대적으로 저비용일뿐더러 쌍용차의 주 수출시장인 유럽이나 이란 시장에서도 충분히 경쟁력을 지닐 수 있다. 소형차 개발 노하우가 풍부한 마힌드라가 좋은 파트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일견 고착된 시장처럼 보이지만, 경차 시장은 사실 무궁무진한 잠재력을 지녔다. SUV, 스포츠카, 상용차 등 다양한 라인업 확장 여지가 남아있어 적은 비용으로 판매 볼륨을 키워낼 수 있다. 경차 라인업의 다변화는 결국 감춰진 부가가치를 창출해내고, 이를 통해 경차의 수익성까지 향상시킬 수 있다. 엔트리 모델의 수익성 향상은 결국 브랜드 전체의 이익 확대와 다른 볼륨 모델 개발을 위한 초석이 된다. 국내 제조사들은 변화하는 시장의 흐름을 읽고 이를 선도해야 한다. 한국산 고급 경차는 더 이상 허황된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자동차 시장이 당면한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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