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조 일가 200년 지배 막 내려
푸조 일가 200년 지배 막 내려
  • 카가이 취재팀
  • 승인 2015.08.01 1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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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주주 바뀌는 프랑스 푸조-시트로엥


판매 위기로 대규모 증자 … 중국 둥펑車, 프랑스 정부가 대주주로

1810년 철강회사로 시작해 세계 7위 자동차 업체로 발돋움한 프랑스 푸조-시트로엥(이하 푸조)의 푸조 가문 지배체제가 종언을 고할 것으로 보인다. 푸조는 독일 폴크스바겐그룹 다음가는 유럽 2위 자동차 업체다. 1월 20일(현지시간) 끝난 푸조 이사회에서 프랑스 정부, 중국 둥펑((東風)자동차가 각각 최소 14%의 지분을 확보하고 푸조 가문의 지분율을 낮추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럴 경우 푸조 가문의 200여년 지배 체제에서 푸조 일가, 프랑스 정부, 중국 둥펑의 삼각 체제로 변경되는 것이다. 푸조 가문의 현재 지분율은 25.5%이며 의결권은 38%다. 증자가 계획대로 진행되면 푸조 가문의 지분율은 14% 수준으로 떨어지고 이사회 의장직을 잃게 된다. 푸조는 증자를 통해 약 30억 유로(약 4조7000억원)를 조달한다.





 
중국 3위 둥펑은 글로벌 업체로 도약

증자는 두 단계로 진행된다. 프랑스 정부와 둥펑 자동차가 최소 7억5000만유로 이상을 투입해 각각 14%의 지분을 확보한다.

이어 14억 유로의 유상증자에 푸조 일가가 1억 유로를 투자한다. 마찬가지로 프랑스 정부와 둥펑도 참여해 똑같은 지분율을 확보한다.

프랑스 정부와 둥펑은 주당 7.5~8유로의 할인된 가격에서 지분을 획득한다. 이날 푸조 주가는 전일 대비 11% 폭락한 10.2유로로 거래를 마쳤다. 푸조 측은 지난해 실적을 공개하는 2월 19일 이전까지 최종 증자안을 공개하겠다고 발표했다.

눈 여겨 볼 부분은 푸조 일가가 이번 증자에서 의견이 엇갈렸다는 점이다. 프랑스 언론에 따르면 티에리 푸조 회장은 최대주주를 유지하기 위해 정부 대신 자본시장에서 자금 조달을 추진했다. 하지만 티에리 푸조의 사촌 로베르트 푸조는 정부 증자안에 동의하며 이견을 보였다.

프랑스 정부는 티에리 회장의 자구책이 현실성이 떨어진다며 둥펑과 동일한 조건으로 증자에 참여하는 자구안을 밀어붙였다. 피에르 모스코비치 프랑스 재무장관은 “푸조가 (푸조 일가의 지배체제 유지와 관계없이) 프랑스 주요 자동차 업체로 남아 있을 수 있도록 정부는 최대한의 영향력을 행사할 것”이라고 말했다. 지배구조는 바뀌더라도 가장 시급한 고용 유지를 최우선으로 하겠다는 게 정부의 속내다.

프랑스는 높은 실업률에 따라 소비침체가 이어지고 경제가 저성장 하는 악순환에 빠져있다. 정부와 둥펑이 증자에 참여하면 푸조가 회생하고 인력 구조조정을 최소화할 수 있다고 본다. 이번 증자가 계획대로 진행되면 둥펑은 글로벌 업체로 도약하는 최초의 중국 국영 자동차회사가 된다. 앞서 2010년 스웨덴의 볼보를 인수한 중국 지리 자동차는 민간기업이다.

푸조는 2008년부터 본격화한 유럽 경제위기 영향으로 줄곧 판매가 줄었다. 지난해 이익이 감소하면서 15억 유로의 현금을 소진했다. 푸조의 지난해 판매대수는 282만대로 전년 대비 4.9% 줄었다. 주력 시장인 유럽 판매가 7.3% 감소한 게 치명타다. 남미·중국은 전년 대비 26% 급증한 55만7000대로 좋은 실적을 냈다.

푸조는 2015년까지 유럽 외 판매 비율을 50% 이상으로 늘릴 계획이다. 지난해 유럽 이외 판매 비중은 43%에 그쳤다. 둥펑과의 협력은 해외 판매를 늘리는 데 중요한 변수다. 푸조는 2015년까지 중국에서 생산능력을 95만대로 확대할 계획이다.

중국 3위 자동차 업체인 둥펑은 푸조 지분 확보로 글로벌 진출에 속도를 낼 전망이다. 둥펑은 이미 중국에서 일본 혼다와 닛산, 한국 기아자동차와 합작회사를 운영하고 있다. 올해 초에는 프랑스 르노와도 합작회사를 설립했다.

푸조는 철강회사가 뿌리다. 1810년 장 프레드릭·장 피에르 푸조 형제는 자신들이 소유한 풍차를 개조해 강판을 제작했다. 주로 톱날·시계에 들어가는 스프링을 제조했다. 1819년에는 ‘푸조’ 상표 특허출원을 냈다. 이후 커피분쇄기·믹서기·재봉틀·세탁기 등 돈 되는 건 뭐든 만들었다.

푸조가 유명해진 것은 후추 분쇄기를 만들면서 부터다. 1870년대부터 생산을 시작한 후추분쇄기는 지금도 전 세계 유명 레스토랑과 가정의 식탁에서 널리 쓰인다. 연간 500만개 이상 팔릴 만큼 이 분야에선 최고의 기술력과 디자인을 인정받고 있다.

자동차 사업은 창업자의 손자인 아르망 푸조가 시작했다. 1880년대 당시 재벌가 자손의 교육 코스인 영국 유학시절 자동차 붐을 예견한다. 그는 먼저 자전거를 개발했다. 이후 집안 어른을 설득해 자동차로 확장한다. 1889년 길이 2.5m, 무게 250kg에 앞뒤 좌석을 마주보게 만든 4인승 3륜차를 파리 세계박람회에 전시한다. 푸조 1호차다. 벤츠의 세계 첫 가솔린 자동차보다 불과 3년 뒤진 셈이다. 2기통, 2.3마력 엔진을 얹고 최고 시속 16km로 달렸다.

창업 과정은 도요타와 비슷하다. 방적기가 본업이었던 도요타는 창업자 아들 도요다 기이치로가 1920년대 미국 여행에서 자동차가 미래 먹거리임을 예견하고 1937년 자동차를 시작했다. 아르망은 친구의 권유로 다임러(벤츠 전신)를 소개 받고 1890년 다임러 엔진을 단 사륜차 ‘타입2’를 제작했다. 6년 간 내부 기술을 축적해 1896년 자체 엔진을 개발해 스위스·독일과 국경이 마주한 소쇼(Sochaux)에 푸조자동차를 설립했다.

푸조는 줄곧 오너 경영체제를 유지해왔다. 푸조 일가 가운데는 직접 경영에 참여한 경우도 있었지만 주로 이사회 의장을 맡아 CEO를 선임해 경영을 맡겨왔다. 이런 확실한 지배구조에 따라 푸조는 그동안 여러 번 위기를 넘겼다. 판매가 줄어 이익이 감소하면 푸조 일가가 증자에 참여해 직·간접적으로 재투자 재원을 마련해줬다.

유럽 시장에 의존하다 직격탄

푸조는 기술력으로도 한 시대를 풍미했다. 1912년 세계 최초로 실린더 한 개 당 4개의 밸브와 캠 샤프트를 갖춘 현대식 엔진을 내놓았다. 1차 세계대전에는 군용차·앰뷸런스·모터사이클 등을 제조하면서 기술력을 쌓는다. 푸조는 줄곧 대중차만 만들었지만 소형 해치백과 지붕이 열리는 차(컨버터블)의 대가로 불렸다. 1934년에는 세계 최초로 하드탑 컨버터블 401 이클립스를 내놨다.

1970년대에는 비약적으로 사세를 키운다. 1976년 경영난에 시달리던 프랑스 3위 업체 시트로엥 지분 90%를 사들인데 이어 1978년 크라이슬러 유럽 부문까지 인수해 세계 10위권에 진입했다. 시련도 닥쳤다. 1991년 미국에 진출한 지 채 20년도 안돼 ‘눈에 띄는 디자인 이외에는 볼 게 없다’라는 혹평과 함께 경쟁차보다 성능·품질에서 뒤지면서 철수했다.

시련은 약이 됐다. 푸조는 미국 시장을 포기하면서 독자적인 디자인을 강화한다. 뾰쪽나온 앞 오버행(범버와 앞바퀴 거리)은 프랑스의 콧대라는 유머도 나왔다. 하지만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가 유럽으로 번지면서 유럽 시장에 의존했던 푸조는 직격탄을 맞았다. 티에리 푸조 회장은 2010년 “미국 금융위기가 왔을 때 미국에서 차를 팔지 않는 게 행운처럼 다가왔다. 유럽 경제위기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고 한탄하기도 했다. 유럽 경제위기가 200년 넘게 유지된 푸조 가문을 뒤흔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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