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승기] 페라리 GTC4 루쏘 T, 절정의 긴장감과 품격의 경계
[시승기] 페라리 GTC4 루쏘 T, 절정의 긴장감과 품격의 경계
  • 이재욱 에디터
  • 승인 2017.04.26 17:46
  • 조회수 193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숨 가쁘다. 손끝이 가늘게 떨린다. 한 순간도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다. 넋이 나갈 만큼 황홀한 경험이다. 페라리. 서킷을 달리는 페라리에 몸을 맡겼다.

페라리의 역사는 곧 모터스포츠의 역사다. 애당초 창업자가 레이스에 나가기 위해 설립한 회사다. 포뮬러원(F1) 챔피언십에 반세기 넘게 단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출전한 유일한 회사기도 하다. 페라리를 제대로 느끼려면 그래서 서킷을 달려봐야 한다.



페라리로 서킷 주행을 할 기회는 흔치 않다. 기본 가격이 억대인 차다. 그 페라리, 그것도 최상위 그랜드 투어러인 GTC4 루쏘 T를 타고 인제 스피디움을 달리는 경험은 기자에게도 특별하게 다가왔다.

페라리의 일반도로용 모델 라인업은  5가지다. 8기통 엔진 GT와 스포츠카, 12기통 엔진 GT와 스포츠카, 그리고 10년에 한 번씩 선보이는 시그니처 스포츠카. 현재를 기준으로 하면 8기통이 탑재된 캘리포니아T와 488 GTB가 각각 GT와 스포츠카 포지션, 12기통 라인업에서는 GTC4 루쏘와 812 슈퍼패스트가 각각 GT와 스포츠카에 해당한다. 시그니처 카가 그 유명한 라페라리.

덕분에 페라리 오너는 세계 최고의 준마(駿馬)를 살 때 자신의 라이프 스타일을 기준으로 선택할 수 있었다. 특히 12기통 엔진에 네 명을 위한 공간을 갖춘 12기통 GT는 더 넓고 안락한 페라리를 원하는 이들에게 꾸준히 인기를 끌었다.



2011년 출시된 FF도 그랬다. FF는 'Ferrari Four'의 약자로, 페라리 최초의 4륜구동 모델이다. 전통적인 유선형 라인 대신 파격적인 슈팅브레이크 스타일을 채택해 실생활에서 네 명이 여행을 떠날 수 있는, 진정한 GT를 추구했다.

그로부터 5년, 지난해 제네바에서 FF의 후속인 GTC4 루쏘가 공개됐다. F430 이후 자취를 감춘 4개의 원형 테일램프가 부활하고, 공기역학 성능이 개선됐다. 엔진 성능은 물론 4륜구동 시스템도 업그레이드됐다. 4륜조향 시스템까지 탑재, 풀체인지급 변화를 겪었다.



그 후 지난해 10월 파리 모터쇼에 또 하나의 루쏘가 등장했다. GTC4 루쏘 T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 터보 엔진을 탑재했다. 페라리가 하나의 모델에 두 가지 엔진을 넣은 건 매우 이례적이다. 또 4인승 GT에 V8 터보 엔진을 탑재한 것도 이번이 처음이다. 변화의 바람이 시작된 것이다.

모델명의 GTC는 엔초 페라리가 총애한 330GTC에서 유래했다. 그란 투리스모 쿠페의 약자다. 여기에 4인승을 의미하는 숫자 4, 이탈리아어로 럭셔리에 해당하는 루쏘(Lusso), 터보 엔진을 의미하는 T가 더해졌다. 모델명에 이 차의 특성이 다 드러난 셈.



강원도 인제 스피디움 피트에 GTC4 루쏘 T가 모습을 드러내자 시선이 집중됐다. 페라리는 모든 차가 주문 제작돼 재고라는 개념이 없다. 이번 시승을 위해 FMK는 이탈리아 본사에서 GTC4 루쏘T 한 대를 공수해 왔다. 페라리의 상징과도 같은 핏빛 붉은색이다.

과연 페라리! 아름다운 라인에서 눈을 떼기 어렵다. 페라리의 바디에 허투루 쓰이는 라인은 단 하나도 없다. 모든 선과 면이 치밀한 공기역학적 계산 끝에 탄생한다는 게 관계자의 설명이다. 한껏 뻗은 보닛만 전체 길이의 절반에 달하고, 승용차의 뒷좌석 위치까지 가야 운전석이 있다.



그랜저와 맞먹는 전장(4922mm)과 긴 휠베이스(2990mm) 덕에 GTC4 루쏘 T는 쭉 뻗은 비례감을 뽐낸다. 엔진은 8기통으로 작아졌지만 우아한 비례는 V12 GT 그대로다. 여기에 통상의 스포츠카와는 차원이 다른 높은 루프라인이 눈길을 끈다. 이 특이한 루프 덕에 페라리로서는 역대 최고 수준인 450L의 트렁크 공간을 확보했다.

정제된 전면부 디자인은 페라리 특유의 카리스마를 뿜어내지만 과격하지 않고, 고급스럽다. 두 개의 테일램프로 회귀한 후면부는 예전 FF에 비해 디테일이 풍부하다. 전폭도 넓어보인다.



실내도 멋스럽다. 최고급 가죽과 유려한 금속이 적절히 섞여 있다. 동승자에게도 디스플레이로 정보를 전달하는 듀얼 콕핏 시스템이 기본 사양으로 채택됐다. 뒷좌석 공간도 어른이 앉기에 충분할 만큼 넓다. 페라리의 '뒷좌석에 앉는다'는 게 퍽 낯설지만, 어쨌든 구색 갖추기용이 아니라 정말 사람이 탈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됐다는 게 중요하다.

유려한 스타일 만큼이나 페라리에 중요한 요소가 레이싱 DNA다. 페라리의 역사는 고집 센 창업자 엔초 페라리에서 시작됐다. 알파 로메오 팀 드라이버였던 그는 자신만의 레이스 팀을 이끌기 위해 경주용 차를 공공도로용 스포츠카로 개조해 팔았다. 그렇게 마련한 돈으로 레이스에 출전했다. 오늘날까지 모든 페라리 모델이 모터스포츠와 긴밀하게 연계돼 있는 것도 그래서다.



많은 이들이 페라리 하면 미드십 엔진의 488GTB나 라페라리를 으뜸으로 꼽는다. 하지만 페라리는 원래 프론트 엔진으로 시작한 회사다. 1975년 308GTB가 나오기 전까지 페라리는 줄곧 프론트 엔진 스포츠카를 만들었다. 오늘날까지 V12 엔진 모델이 프론트 미드십을 채택하는 것도 그런 역사의 연장선상이다.

터보 엔진을 거부할 이유도 없다. 자연흡기가 아니면 페라리가 아니라고 하는 건 페라리를 반만 알고 하는 이야기다. 페라리 시그니처 모델의 시조인 288GTO와 F40도 V8 터보 엔진을 장착했었다. 페라리의 주 무대인 F1에서도 2014년 이후 쭉 터보 엔진을 사용한다. 그런 만큼 페라리는 터보 엔진 개발 노하우가 풍부한 회사다.



GTC4 루쏘의 12기통 자연흡기 엔진이 내는 690마력의 최고출력에는 못 미치지만, GTC4 루쏘 T 역시 610마력의 강력한 파워를 자랑한다. 최대토크가 77.5kg.m, 덕분에 0-100km/h 가속은 3.5초면 마무리된다. 최고속도는 320km/h. 네 명이 탈 수 있는 페라리에 충분한 성능이다.

GTC4 루쏘와의 가장 큰 차이점은 4륜구동이 빠진 것. 덕분에 후륜구동 특유의 아찔한 운전 재미를 만끽할 수 있다. 대신 4륜조향 시스템은 그대로 유지돼 긴 차체에도 날렵하게 거동한다.

사실 페라리는 기본이 스포츠다. 488GTB나 812 슈퍼패스트 같은 스포츠카의 마네티노 스위치엔 컴포트 모드가 없다. 젖은 노면을 위한 웻 모드 외엔 스포츠가 기본이고 레이스 모드와 2단계의 전자제어 해제 장치만 있을 뿐. 그런데 GTC4 루쏘 T는 투어러다. 컴포트 모드가 기본이고 스포츠 모드만 있다. 여기서 차의 성격이 명확히 드러난다.



스티어링 휠 왼쪽 아래, 붉은 색 시동 버튼을 누른다. 8기통 엔진의 카랑카랑한 사자후가 울려퍼진다. 오른쪽 패들 시프트를 당겨 1단을 넣고 서서히 움직인다. 스티어링 휠을 잡은 두 손 만으로 모든 주행을 제어하는 레이스카의 DNA를 느끼며 서킷으로 들어선다.

인제 스피디움은 익숙한 곳이다. 몇 년째 행사와 여가 생활로 자주 찾아 주행해 봤다. 페라리로 들어서는 서킷은 무게감이 달랐다. 출력당 무게비가 2.6kg/마력에 불과한 차다. 아무리 안락함을 논하는 투어러지만 그 안에 붉은 말이 살아 숨쉬고 있다.



처음 한 바퀴, 친해지기를 기다려 곧장 주행을 시작한다. 메인 스트레치에 들어서 자신있게 가속 페달을 밟았지만 이내 폭발적인 가속력에 압도된다. 600m를 조금 넘는 직선주로에서 GTC4 루쏘 T는 가속 페달을 끝까지 밟지 않았음에도 240km/h 이상에 도달했다.

"더, 더 가속 페달을 밟으세요. 여기선 더 밟아도 돼요." 다른 때라면 인스트럭터가 속도를 줄이라고 하겠지만, GTC4 루쏘 T에 동승한 인스트럭터는 오히려 가속을 부추긴다. 인스트럭터를 믿고 속도를 내자, 마치 거짓말처럼 코너를 돌아 나간다. 지금껏 경험해 본 적 없는 속도의 코너링이다.



특히 헤어핀을 돌아 롤러코스터처럼 이어지는 5, 6번 코너에서는 4륜조향 시스템이 빛을 발했다. 긴 차체에도 언더스티어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같은 코너를 캘리포니아 T로도 돌아 봤지만, 휠베이스가 320mm나 길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

나름대로 서킷 경험이 많고 인제 스피디움도 익숙하지만 610마력의 페라리와 함께하면 긴장을 늦출 수 없다. 변속하자마자 시프트 인디케이터에 다음 변속을 하라는 붉은 등이 들어오고, 코너 하나를 빠져나가자 순식간에 다음 코너가 나온다. 성능이 다르면 서킷을 공략하는 라인도 달라진다. 새로운 자극에 아드레날린이 솟구친다.



그럼에도 차 안은 지극히 평화롭다. 속도감이 느껴지지 않는 게 아니다. 불안감이 전혀 없다. 과거 페라리는 전문 드라이버가 아니면 탈 수 없을 만큼 몰기 어려웠다. 작은 실수도 스핀으로 이어질 정도로 콧대높은 정통 스포츠카였다.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GTC4 루쏘 T는 전자제어식 서스펜션과 3세대 사이드 슬립 컨트롤, ESP 9.0 등 첨단 전자장비로 무장했다. 이들 최신 전자제어 시스템은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차의 불안정한 거동들을 제어한다. 덕분에 운전자는 세계 최고의 슈퍼카 조종이 익숙지 않아도 흡사 F1 드라이버가 된 기분을 만끽할 수 있다.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를 만큼 주행이 빨리 끝났다. 그런데 새삼 궁금해졌다. 뒷좌석이 그렇게 넓은데, 과연 뒤에 앉아서도 서킷을 즐길 만할까? 기대 반 의심 반으로 GTC4 루쏘 T의 뒷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물론 GTC4 루쏘 T의 뒷좌석에 앉아 서킷을 달릴 일은 아마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예외적인 상황에도 뒷자리는 제법 앉을 만했다. 예상 외다. 앉은 키가 큰 기자가 헬멧까지 쓰니 깊은 코너에서 간혹 머리가 천장에 닿았지만, 헬멧을 벗는다면 그럴 일도 없겠다. 앞좌석에 무릎도 닿지 않는다. 세단처럼 아늑한 공간은 아니지만 체구가 작은 사람이나 어린이라면 장거리 여행도 힘들지 않다.



자동차는 현대 공학기술의 총아와도 같다. 기계공학, 전자공학, 공기역학, 구조역학, 재료공학 등 여러 공학적 지식이 자동차 개발에 총동원된다. 페라리는 그 중에서도 최정점에 서 있다. 모터스포츠에서 담금질한 첨단 기술로 빚은 레이싱 머신이다.

하지만 페라리에 담긴 기술이 얼마나 뛰어난지, 얼마나 대단한 수치인지는 사실 중요치 않다. 페라리는 꿈과 낭만을 파는 회사기 때문이다. 모든 이들의 마음 속에 있는 최고를 향한 열망, 그걸 자극하는 회사가 페라리다.



그 꿈이 언제나 치열한 레이스의 현장에 머무르는 건 아니다. 아이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거나, 혹은 캐리어 가득 짐을 싸들고 여행을 떠나는 순간조차 드림카와 함께하고 싶은 이들이 있다.  GTC4 루쏘 T는 바로 그런 이들을 위한 차다. 특히나 기존 V12 모델이 부담스러웠던 이들을 위한 약간 더 현실적인 대안이다.

물론 모든 이들이 GTC4 루쏘 T를 선택할 수는 없다. 기본 가격만 3억5000만원이 넘기 때문이다. 그래도 꿈이 있다는 건 행복한 일 아닌가? 사랑하는 배우자, 아이들과 함께 페라리에 몸을 싣고 훌쩍 떠나는 여행을 상상해 본다. 절정의 긴장감과 최고의 품격에, 온 가족의 꿈을 싣고 달리는 페라리가 바로 GTC4 루쏘 T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