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승기] 산으로 간 지프, 랭글러에게 갈 수 없는 길은 없다
[시승기] 산으로 간 지프, 랭글러에게 갈 수 없는 길은 없다
  • 이재욱 에디터
  • 승인 2017.06.05 13:05
  • 조회수 248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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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오프로드 코스가 있고, JK(랭글러) 전용 코스가 있어요. 어느 쪽으로 가실래요?"

지프 랭글러 운전석에 앉자마자 인스트럭터가 물었다. 당장 눈에 보이는 오프로드 코스만 해도 만만치 않아 보이는데, 이보다 더 한 코스가 있단 말인가? 선뜻 겁이 나 망설였지만 랭글러의 한계를 경험하기 위해 후자를 택했다.



지프의 브랜드 파워는 대단하다. 레니게이드부터 그랜드 체로키까지, 모든 모델이 제대로 오프로드를 달릴 수 있다는 믿음을 준다. 미국 브랜드 중에서도, FCA 그룹 내에서도 눈에 띄는 존재감이다. 오프로드 하면 랜드로버도 뒤지지 않는다. 하지만 우아한 랜드로버로 오프로드를 달리기는 조심스러운 반면, 지프는 실내까지 쿨하게 물청소할 수 있는 마초적인 브랜드다.

올해로 13년 연속 개최되는 지프 캠프는 그런 지프의 색깔을 느낄 수 있는 가장 지프다운 행사다.  지프로 수풀을 헤치고 산 속으로 떠나 캠핑을 즐긴다. 올해부터는 지프 오너 외에 일반 참가자도 모집해 지프의 진면목을 느낄 수 있도록 했다.

지프 캠프는 한국에서만 열리는 행사가 아니다. 1953년 마크 A. 스미스가 자신의 친구들과 함께 지프를 타고 루비콘 트레일을 통과한 행사가 지프 잼보리의 시초가 됐고, 그 뒤 60년 넘게 세계 각지에서 잼보리, 캠핑, 어드벤처 등 다양한 행사가 개최돼 왔다. 한국은 2004년 동북아 최초로 지프 캠프가 개최된 뒤 매년 규모를 키워 올해는 역대 최대 규모다.



이번 행사에는 지프의 전 라인업이 총출동했다. 어떤 모델이든 오프로드에 부족함이 없다는 자신감이다. 하지만 이것만으로 지프의 진가를 확인할 수는 없다. 순수하게 오프로드 주행을 위해 탄생한 차, 랭글러를 타 봐야 한다.

주요 완성차 업체에서 출시된 차들 중 오프로더라고 할 만한 건 손에 꼽는다. 그 중에서도 군용차나 설계 전용을 고려하지 않고 순수하게 오프로드 주행 성능만을 염두에 두고 개발된 차는 랭글러가 유일하다.



지프 캠프의 오프로드 코스에서 랭글러는 두 가지 코스를 선택할 수 있다. 여타 지프들과 같이 장애물을 통과하는 '챌린지 파크', 그리고 랭글러만을 위해 만들어진 '와일드 코스' 등이다.

챌린지 파크는 임의로 조성된 장애물을 통해 험지주파능력을 확인하는 코스다. V계곡, 시소, 나무다리 등 다양한 장애물을 체험할 수 있다. 지프의 모든 모델은 이 코스들을 순정 상태로 주파할 수 있다.

반면 와일드 코스는 아무나 들어갈 수 없다. 높은 지상고와 기계식 파트타임 4륜구동 시스템을 갖춘 랭글러만이 도전할 수 있다. '트레일 레이티드' 인증을 받은 트레일호크 버전이라면 다른 모델도 주파할 수 있지만 이번에는 안전을 위해 랭글러만 주행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다른 코스들은 모두 스키 슬로프에 조성됐지만, 와일드 코스는 슬로프와 슬로프 사이 수풀이 우거진 지대에 꾸며졌다. 애초에 차가 다니지 않는 구역에 랭글러를 위해 전용 코스를 '개척'한 것이다. 그만큼 여타 장애물 구역과는 수준이 달랐다.

이 코스를 함께 돌파할 차는 랭글러 스포츠. 3도어 숏바디에 기계식 4륜구동이 탑재됐지만 랭글러가 자랑하는 전륜 스웨이바 분리 기능이나 디퍼렌셜 록 기능은 빠진 '기본형' 랭글러다. 가격은 3600만원선으로 랭글러 중 가장 저렴하기도 하다.

하지만 이 엔트리 랭글러도 극한의 숲길을 통과하는 데에는 손색이 없다. 코스 진입에 앞서 변속 레버를 중립에 두고, 중간변속기를 4륜 저속 기어로 바꾼 뒤 코스에 들어섰다.



숲에 진입하자마자 바퀴가 미끄러진다. 이틀 전 많은 비가 온 탓이다. 양지바른 슬로프의 장애물은 하루만에 다 말랐지만 나무그늘에 가려진 와일드 코스는 질척이는 진흙밭이었다. 좀 더 조심스럽게, 가속 페달을 부드럽게 밟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랭글러에는 숏바디와 롱바디(언리미티드)가 있다. 둘 다 뛰어난 오프로더지만 장단점이 있다. 온로드와 마찬가지로 숏바디는 민첩하고, 롱바디는 안정적이다.

숏바디는 휠베이스가 짧아 회전반경이 작고  여각(break-over angle)이 커서 언덕이나 바위를 넘을 때 배가 걸릴 일이 적다. 대신 경사가 심하고 노면이 미끄러운 곳에서는 자칫 급가속을 하다가 차가 스핀하거나 뒤로 넘어가버리는 경우가 생긴다. 롱바디는 반대로 회전반경이 크고 여각이 작지만, 높은 경사로에서도 스핀할 위험이 적고 안정적이다.

실제로 차 한 대가 지나가기도 벅찬 좁지만 랭글러 스포츠는 구불구불한 길을 어렵지 않게 돌아 나갔다. 마치 군생활 시절 몰던 전술 지프차를(물론 지프가 아니라 레토나였지만) 연상시켰다. 노면이 미끄럽고 풀도 무성하게 자라 있어서 간혹 바퀴가 슬립을 일으켰지만, 항상 안정적으로 구동력을 배분하는 4륜구동 시스템이 꾸역꾸역 등판을 이어나갔다.



나뭇가지나 풀에 차체가 긁힐까 걱정은 덜어놔도 좋다. 범퍼는 물론 휀더와 사이드미러까지, 랭글러의 쉽게 긁힐만한 부위는 모두 무광 플라스틱으로 처리됐다. 원한다면 탑을 뜯고 오픈 에어링을 즐기거나 소프트탑으로 교체할 수도 있다. 차 안에 흙탕물이 튀거나 타고 내리며 지저분해졌을 땐? 실내의 배수구를 열고 물청소하면 끝이다. 그야말로 모든 설계가 오프로드 환경을 고려해 만들어진 것이다.

랭글러의 보닛보다 높은 풀들을 밀어내며 산을 오르자 깊숙히 파놓은 구덩이가 나타났다. 조금 과장을 보태자면 차 한 대가 쏙 들어갈 만큼 깊었다. 용기를 내 진입하자 들어갈 때는 땅바닥을 보고, 올라올 때는 하늘을 봤다. 체감 상 수직에 가깝게 서 있는 기분이다.

미끄러운 진흙 탓에 나갈 수 있을 지 조금 걱정됐지만, 인스트럭터는 대수롭지 않게 "가속 페달을 밟으며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라"고 조언했다. 그리고 랭글러는 가뿐히 구덩이를 빠져나갔다. 더 깊은 구덩이도 통과할 수 있지만 일반 고객들이 겁먹을 수 있어 구덩이를 메웠단다.



한참 숲길을 달려 빠져나오자 어느새 슬로프 정상이다. 이제는 바람을 쐬며 깎아지른 슬로프를 내려갔다. 이런 정복감이 오프로드의 매력일까? 상남자 냄새가 물씬 풍기는 랭글러와 함께 하니 여운이 더 진하게 남았다.

많은 SUV들이 오프로드 성능을 강조한다. 첨단 전자제어식 4륜구동 시스템이 네 바퀴에 밀리초 단위로 구동력을 배분한다고 홍보한다. 랭글러에게는 그런 복잡한 시스템도, 최신 전자제어도 없다. 우직한 기계식 4륜구동만 탑재됐을 뿐이다. 하지만 최신 첨단 SUV들도 쩔쩔매는 길을 손쉽게 뚫고 나간다.

흔히 어떤 차가 헤어날 수 없는 매력을 지녔을 때 '~바이러스' 라는 말을 쓴다. 대표적인 게 '포르쉐 바이러스'다. 지프에게도 그런 치명적 매력이 있다. 어떤 험한 길도 뚫고 나갈 수 있다는 믿음을 심어준다. 랭글러는 이 '지프 바이러스'로 내면의 원초적 마초성을 자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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