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신사의 나라' 영국의 클래식 카 문화는 어떻게 꽃피웠나
[칼럼] '신사의 나라' 영국의 클래식 카 문화는 어떻게 꽃피웠나
  • 이재욱 에디터
  • 승인 2017.09.11 07:37
  • 조회수 36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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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은 한때 자동차 강국이였다. 50개가 넘는 자동차 공장에서 매년 200만대의 차를 생산했다. 글로벌 시장의 경쟁에서 도태하면서 지금은 그 위세가 예전만 못하지만, 특유의 귀족 문화와 융화해 탄생한 자동차 문화는 아직까지도 건재하다. 런던 시내에서 심심찮게 클래식 카를 만날 수 있는 것도 그런 까닭이다.


영국의 자동차 역사는 1891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영국의 엔지니어 프레데릭 심스(Frederick Simms)는 독일에서 가솔린 내연기관을 발명한 고 틀립 다임러의 절친한 친구였다. 그는 다임러 사의 엔진을 영국에서 생산, 판매할 수 있는 독점권을 사들여 1891년 영국의 첫 엔진 제조사를 설립한다. 더 나아가 1895년에는 프랑스에서 파나르-르바소 차체를 들여와 다임러 엔진을 얹고 주행했는데, 이것이 영국의 첫 내연기관 자동차다.

1896년에는 영국 자동차 산업의 발전을 저해했던 적기법(Red Flag Act)이 개정됐다. 적기법은 자동차가 도로를 달릴 때 적기를 들고 길을 트는 승무원을 포함해 항상 세 사람이 차와 동행해야 하며, 고속도로에서는 4mph(6.4km/h), 시내에서는 2mph(3.2km/h) 이상의 속도를 낼 수 없도록 통제한 법이다. 3톤 이하의 차량에 대해서는 승무원 규정을 폐기하고 제한속도를 14mph(23km/h)로 높이면서 비로소 자동차 산업이 태동기를 맞이했다.



초기 영국 자동차 산업은 독일과 프랑스의 기술력에 의존했지만 1900년대 들어서는 독자적인 개발 역량을 쌓아 올렸다. 1913년까지 200개가 넘는 자동차 회사가 세워졌고 생산량은 1만4000대에 달했다. 미국의 자동차왕 헨리 포드가 맨체스터에 포드 공장을 새로 지으면서 양적 팽창도 이뤄졌다. 전쟁과 공황의 여파에도 오스틴과 모리스, 포드 등 대형 제조사를 중심으로 성장은 계속됐다. 1932년에는 생산량이 프랑스를 뛰어넘었고, 2차 대전 직전인 1937년에는 승용차 38만대, 상용차 11만대를 생산하며 세계적인 자동차 대국이 됐다.


영국차의 영광을 간직한 곳

제2차 세계대전이 종결된 뒤, 전시체제를 탈피한 영국은 군수품 생산에서 쌓인 노하우를 바탕으로 산업 팽창기를 맞이한다. 1950년에는 영국에서 생산 되는 자동차의 75%가 수출될 정도였다. 세계 시장에 수출되는 자동차 중 52%가 영국제였다. 박물관 에서는 이 시기 많은 영국의 클래식 모델들을 만날 수 있다. 영국군의 군용차로 만들어졌던 랜드로버 시리즈 1 같은 모델들이다. 1959년 출시돼 반세기동안 사랑받은 모리스 미니 마이너도 볼 수 있다.



당시 영국 자동차 산업의 폭발적인 성장에 힘입어 실험적인 도전도 이어졌다. 로버는 내연기관 엔진을 대체하기 위한 가스터빈 엔진 연구에 나섰다. 1961년 T4 세단 콘셉트카를 선보인 데 이어 1963년에는 가 스터빈 엔진을 탑재한 르망 레이스카까지 만들었다. 비록 나쁜 연료효율 때문에 상용화에는 이르지 못 했지만, 황금기였던 당대 영국 자동차 산업의 단면을 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러나 영원할 것 같았던 영국차의 전성기는 70년 대부터 서서히 흔들린다. 프리미엄 시장에서는 독 일차가, 대중차 시장에서는 값싸고 튼튼한 일본차가 빠르게 시장을 잠식했다.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군소 브랜드 인수합병과 국유화 등 많은 조치가 취해졌지만 몰락을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결국 80~90 년대를 거치며 몇몇 코치빌더와 키트카 메이커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업체들이 역사 속으로 사라졌 다. 지금 남아있는 영국의 메이저 완성차-재규어, 랜드로버, 롤스로이스, 벤틀리, 미니 등은 모두 다른 제조사에 인수된 상태다.



영국 제1의 산업도시 버밍엄에서 30분 정도 거리인 코번트리에는 영국 자동차 박물관(British Motor Museum)이 자리하고 있다. 이곳에서는 영국 자동차 산업의 흥망성쇠를 한 눈에 볼 수 있다. 냉철한 이성주의로 다듬어진 독일차, 낭만이 가득한 프랑스차와는 다른, 귀족의 품격과 대중의 소박함이 공존하는 것이 바로 영국차다.

시대별로 전시된 차만큼이나 흥미로운 것이 콜렉션 센터다. 이곳에는 역사 속에 족적을 남긴 다양한 모델들이 소장돼 있으며, 전문적인 미케닉들의 복원 작업도 이뤄진다. 럭셔리 브랜드의 초희귀 소장품은 물론 영국의 크고 작은 제조사들이 만들던 대중차들도 여럿 볼 수 있는데, 가령 독특한 삼륜차 릴라이언트나 사라진 브랜드들이 공장 폐쇄 전 마지막으로 생산한 차도 소장 중이다. 세계를 호령했던 영국 자동차 산업의 흐름을 보고 싶다면 꼭 들를 만한 곳이다. 재규어 랜드로버 본사와 바로 붙어있으니 공장 투어를 병행하면 더 좋다.


세금보단 문화를, 규제보단 존경을

영국 자동차 산업은 비록 예전만 못하지만, 100년 넘는 역사와 함께 성숙해 온 문화는 건재하다. 섬이 라는 지형적 특성, 미국과 유럽의 가치관이 혼재한 문화적 특성 탓에 영국의 자동차 문화 역시 다른 나라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양식으로 자리 잡았다. 과격한 아메리칸 머슬과 예리한 유러피언 스포츠카가 공존한다.



또 오직 영국에서만 볼 수 있는 귀족의 여유와 화려함은 상류층을 위한 그랜드 투어러와 럭셔리 카에 오롯이 담겨있다. 하지만 아무리 제품이 발달해도 이를 뒷받침해 줄 제도적, 사회적 인프 라가 없으면 하나의 문화로 자리잡을 수 없다. 누구에게나 사랑받는 영국의 자동차 문화는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영국 축구의 성지로 불리는 런던 외곽 웸블리 (Wembley) 역 주변에는 작은 자동차 클러스터가 위 치해 있다. 수십 개 정비소와 중고차 딜러, 부품상이 한 공간에 모여 있다. 그 중에는 우리나라에서 보기 힘든 특별한 곳도 있는데, 바로 런던에서 가장 큰 클래식 카 딜러인 '더 체커드 플래그(The Chequered Flag)' 다. 이곳의 대표인 그레이엄 숄즈(Graeme Scholes)는 영국인에 게 클래식 카는 박제된 소장품이 아닌 살아있는 역사라고 설명한다.



클래식 카는 말 그대로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는 차다. 오래됐다고 해서 모든 차가 클래식 카는 아니다. 때문에 그 가격도 차의 역사적 가치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숄즈 대표가 매매하는 차들은 상류층을 위한 초고가 클래식 카가 아닌, 모두를 위한 클래식 카다. "클래식 카가 늘 비싸기만 한 건 아닙니다. 평범한 대중차나 럭셔리 브랜드에서 나온 차들 중 존중받을 가치가 있는 차라면 클래식 카가 될 수 있죠. 여기에 있는 오스틴 미니나 BMW 6 시리즈도 그렇게 비싸지 않지만 클래식 카로 인정받는 차들입니다."

맞는 말이다. 한국에서도 오래된 차에 대한 관심이 커지는 추세다. 하지만 구매자는 올드카 가격이 너무 비싸 구매를 망설이고, 판매자는 자신이 차를 복원하는 데 들인 노력을 인정받지 못한다고 하소연한다. 영국에서는 이런 문제가 없을까?

"모든 재화와 마찬가지로 클래식 카도 수요와 공급에 따라 적정가격대가 정해집니다. 찾는 사람이 많 으면 차값은 오르기 마련이죠. 하지만 동시에 공급 이 충분하면 터무니없이 비싸지지도 않습니다. 우리가 올드 롤스로이스를 4만 파운드(한화 약 6000만 원)에 파는 것도 그런 까닭입니다." 결정적 차이는 여기서 나온다. 수요와 공급이 늘어 나면서 시장 규모가 커지면 역설적으로 합리적인 가격대가 형성된다는 것이다.



'수입차 전문' 간판이 흔한 한국과 달리, 영국의 개러지들은 스페셜리스트(specialist) 형태로 발달해 왔다. 이들은 수십 년 간 한 브랜드의 차를 다뤄 온 전문가들이다. 공식 서비스 센터 미케닉 출신이나 모터스포츠 현장에서 활동하던 사람도 많다. 조금만 오래돼도 '잘 보는' 정비소 찾기가 하늘에 별따기인 한국과 달리 영국에서는 스페셜리스트들이 브랜드 별로 포진해 있다. 덕분에 시간과 비용을 절감하면서 차량 관리가 가능하다.

또 수요가 충분하니 부품 수급에도 큰 어려움이 없다. 웬만한 차들의 부품은 개러지와 인접한 부품 전문 셀러를 통해 구입할 수 있다. 수입차 부품을 구하려면 공식 서비스 센터에서 비싸게 사거나 몇 주 동안 해외배송을 기다려야 하는 한국과는 다르다. 차량관리가 용이하니 수요가 늘어나고, 수요가 늘어나니 중고차 시세도 안정적이다. 결국 시간과 돈이 많은 상류층이 아니더라도 누구나 클래식 카를 구매 리스트에 올릴 수 있게 된다.

"제도적으로도 클래식 카 유지는 어렵지 않습니다." 숄즈 대표가 덧붙였다. 영국은 신차 가격이 비싼 나라다. 까다로운 배출가스 규제와 안전 기준을 충족 시키기 위해 매년 차 가격은 오르는 추세다. 게다가 이산화탄소 배출량에 비례해 누진세가 적용되고, 고가 차량의 경우 추가적인 재산세까지 징수된다. 반면 오래된 차에 대해서는 세율도 낮아지고, 일정 이상으로 오래된 차에 대해서는 아예 자동차세 와 등록세 등을 일절 면제해주기까지 한다.



배출가스 검사 역시 연식에 따라 규제를 완화해 적용하거나 아예 면제된다. 오래된 차를 굳이 제도적으로 까다롭게 관리할 필요가 없다는 판단에서다. "클래식 카를 산 사람들은 그 차로 매일 출퇴근하지 않습니다. 차고에 세워두고 기름치기 바쁘죠. 차를 아끼니까 운전도 조심히 합니다. 그런 차에 최신 기준을 들이대며 규제해서 얻는 것보다 규제를 풀어줌으로써 얻는 문화적·사회적 가치가 훨씬 크다는 걸 정부에서도 알고 있습니다."

더 체커드 플래그를 방문한 날도 많은 사람들이 전 시장을 찾았다. 요즘 차에서 찾을 수 없는 멋을 꿈꾸 는 젊은 부부부터 과거 자신의 로망이었던 올드카 를 보러 온 노인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클래식 카를 현실적인 대안으로 고려하고 있었다.

자동차는 기계에 불과하지만, 그 안에는 미술과 철학, 시대정신이 담겨 있다. 세계를 호령하던 영국 자동차에도 호방함과 품격이 공존하고 있었다. 오늘날 영국보다 3배나 많은 자동차를 생산하는 한국이지만, 그럼에도 그들의 역사와 함께 자라 온 문화와 제도가 부러운 것은 필자만의 질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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