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MW의 젊은 피
BMW의 젊은 피
  • 카가이 취재팀
  • 승인 2015.08.06 1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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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자동차 회사 BMW가 2014년 12월 40대의 젊은 하랄트 크루거(Harald Kruger·49) 생산부문 총괄사장을 차기 회장으로 선임했다. BMW의 오너인 콴트 일가가 주도적으로 참가하는 감독이사회(이하 이사회)에서다. 임기는 2015년 5월 시작해 2020년대까지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통상 회장 임기는 6∼10년으로 60세가 정년이다. BMW같은 독일의 대기업은 대주주가 직접 경영에 참여하지 않고 주로 이사회 멤버로 차기 CEO 선임이나 대형 투자를 승인한다.



▎49세에 BMW 차기 회장에 선임된 하랄트 크루거. 매출 120조원 BMW그룹을 이끈다

BMW의 젊은 회장 선임 보도가 나온 2014년 12월 한국 경영계는 오너 자녀가 승계하는 대기업 지배구조 논란이 뜨겁다. 1등석 승객에 대한 서비스 규정을 위반했다고 사무장을 비행기에서 내리기 한 이른바 ‘땅콩 회항’으로 불리는 대한항공 조현아 부사장의 ‘수퍼 갑질’ 때문이다. 언론과 SNS에서는 금 수저를 물고 태어나 평생 남에게 고개 숙이지 않고 경영권과 부를 상속받는 일부 3·4세의 잘못된 행태에 대한 질타가 끊임없이 이어진다. 하지만 이번 문제의 근본인 검증받지 않는 오너 자녀의 승계에 대한 논의는 찾아 보기 힘들다.

1953년 한국전쟁 이후 자본주의가 급속히 진행되면서 재계는 대기업 위주로 판이 짜여졌다. 1인당 국민소득이 3만 달러(약 3000만원)를 바라보는 선진국 대열에 근접했지만 아직도 한국 사회에 걸맞는 지배구조 논의는 먼 산만 바라볼 뿐이다. 자본주의 역사가 200년이 넘는 유럽과 미국 같은 선진국에서는 사회 문화를 반영한 성숙한 지배구조를 확보했다. 초창기 오너 일가 자손의 경영권 승계는 한국과 마찬가지였지만 숱한 문제를 낳아 여기서 탈피한다. ‘경영과 소유의 분리’를 주제로 이사회를 통한 간접 지배가 뿌리를 내린 것이다. 아울러 이사회에서 선임한 전문 경영인의 입지가 커지면서 오너 일가의 지배구조 논란도 사그라졌다. ‘경영권 승계=자녀’라는 한계에 갇힌 한국 경영계에 BMW의 지배구조를 들여다보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다.

크루거 회장 내정자는 2015년 5월 노르베르트 라이트호퍼(58) 회장의 자리를 물려받는다. 그는 49세로 현 글로벌 자동차 업체 CEO 가운데 가장 젊다. 세계 1위인 도요타자동차를 이끄는 도요다 아키오는 창업 일가 4세로 58세다. 도요타 일가는 도요타 지분의 2% 정도만 보유하고 있지만 경영에 종종 참여한다. 미국 제너럴모터스(GM) 회장 메리 바라는 52세, 포드 CEO 마크 필즈는 53세다.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은 76세다.

BMW 이사회는 크루거 선임에 대해 “기술혁신과 소비자 취향 변화를 극복하기 위한 세대교체의 첫걸음”이라고 발표했다. BMW는 줄곧 40대 젊은 회장을 임명해 경험 많은 50대 중반의 부사장을 이끌어왔다. BMW 이외에 다임러 벤츠나 아우디 같은 글로벌 자동차 업체도 종종 40대 회장을 선임, 기존 조직에 변혁을 시도해왔다. 요아킴 밀베르크 BMW 이사회 의장은 “자동차산업이 근본적 변화를 겪고 있는 가운데 BMW가 지금처럼 고급차 부문을 선도하려면 적당한 시기에 다음 세대에 책임을 넘겨야 한다”고 말했다. 콴트 가문의 슈테판 콴트 이사회 부위원장은 “BMW에 창의적인 에너지를 지닌 젊은 세대가 필요하다”고 언급했다.

크루거는 독일 명문인 아헨공대를 졸업하고 1992년 BMW에 인턴으로 입사했다. 이후 영국공장 엔진생산 담당, 연구소를 거쳐 2008년 인사총괄 임원으로 경영이사회 멤버가 됐다. 2013년에는 회장을 맡기 위한 요직으로 꼽히는 생산부문 사장을 맡았다. 1990년대 이후 BMW의 역대 회장은 모두 이공계 출신에 생산·연구소를 경험했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크루거 역시 이공계 출신에 생산·연구소라는 전통을 이어받은 셈이다. 그는 친환경차 개발과 생산을 키워온 현재의 경영 기조를 이어갈 것으로 보인다. 라이트호퍼 회장은 2015년 BMW 이사회 의장으로 자리를 옮긴다. 밀베르크 이사회 의장은 퇴임, 사회공헌과 자선재단을 이끈다.

크루거는 한국과 인연도 있다. 2011년 BMW코리아가 설립한 환경재단인 BMW코리아 미래재단 설립 발표회에 참석했다. 당시 그는 “한국 수입차 시장은 아시아에서 중국 다음 가는 중요한 시장”이라며 “세계에서 가장 저평가된 시장”이라고 말했다. 이어 “한국 사회는 번득이는 아이디어와 활기가 넘쳐난다. BMW 본사가 한국에 큰 관심을 둬야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BMW 영광은 콴트 가문 인연으로 시작





▎독일 뭔헨의 BMW 본사 건물.
네덜란드 출신인 콴트 일가는 1900년대 초 섬유업체를 기반으로 큰돈을 벌었다. 이 자금으로 인수합병(M&A)을 통해 사업을 확장했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독일 최대 부호로 떠올랐다. 콴트 일가가 BMW와 인연을 맺은 것은 1959년 지분의 50%를 인수하면서부터다. 당시 BMW는 중소 자동차 업체로 재정난을 겪다 다임러 벤츠에 인수될 위기였다.

1916년 항공기 엔진 개발 업체로 출발한 BMW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나치에 협력했다. 아돌프 히틀러는 BMW에 “자동차 생산을 중단하고 전투기 엔진 생산에 전념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BMW의 뮌헨 자동차 공장은 항공기 엔진 및 부품 공장으로 바뀌었다. 전쟁이 끝난 뒤 종범으로 몰렸고 연합군은 비행기 엔진뿐 아니라 자동차 제조 면허를 박탈했다. 자동차에 대한 미련으로 모터사이클 엔진을 이용한 3륜차를 제작하기도 했지만 재정난은 가속화했다. 당시 고급차 시장은 다임러 벤츠가 장악한데다 대주주가 없는 BMW는 조만간 벤츠나 미국의 자동차 업체에 인수될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했다.

이때 구원투수로 나타난 것이 헤르베르트 콴트(1910~1982)였다. 당시 BMW의 지분을 일부 보유했던 헤르베르트는 재산 대부분을 투자해 BMW의 대주주로 올라선다. M&A 위기에서 벗어난 BMW는 확실한 대주주의 지원 아래 안정을 되찾고 성과를 내기 시작했다.

당시 독일 재계에서는 ‘헤르베르트가 엄청난 도박을 한 것’이라는 소문이 자자했다. 고급차 시장에서 벤츠는 절대 강자였다. BMW는 성능이 뛰어난 소형차를 만드는 중소 업체에 불과했다. 비슷한 시기, 아우디는 벤츠에 팔렸다가 몇 년 후 폴크스바겐에 다시 인수되는 등 수난을 겪었다. 헤르베르트는 BMW가 보유한 기술력과 브랜드 가치, 미래 성장 가능성에 대해 확신했다.

콴트 가문은 BMW의 오너가 됐지만 경영에는 항상 일정 거리를 유지했다. 자동차 개발과 생산·마케팅·판매에는 해박한 전문경영인을 선임해 최대한 힘을 실어줬다. 콴트 일가는 이사회 멤버로 참여하면서 회장 선임과 대형 투자를 결정하는 방식으로 간접 지배했다.

1982년 헤르베르트가 사망하고 BMW의 지분은 미망인인 요한나와 자녀인 주자네와 슈테판에게 넘어갔다. 이들은 각각 16.7%, 17.4%, 12.6%의 BMW 지분을 보유하고 있다. 헤르베르트의 비서 출신으로 세번째 부인이었던 요한나는 남편의 뒤를 이어 1997년까지 이사회 위원으로 활동 했다. 그도 일상적 경영에는 관여하지 않고 대규모 투자와 회장 선임 같은 주요사안에 대주주 권한을 행사한다.

BMW가 본격적인 성장을 한 것은 콴트 일가가 1970년 전문경영자인 에버하르트 폰 퀸하임을 회장으로 선임하면서부터다. ‘콴트의 동업자’로 불렸던 퀸하임은 1993년까지 무려 23년간 회장을 맡으면서 2006년 벤츠를 꺾고 ‘고급차 1위’의 토대를 다졌다. 그의 재임 시절에 BMW를 대표한 3·5·7시리즈 세단이 모두 출시됐다. 현재 그의 아들 핸드릭 폰 퀸하임이 BMW 아시아·태평양 담당 부사장으로 근무한다.

오너 자녀들 평사원에 섞여 가명 쓰며 근무

퀸하임 회장은 벤츠의 S클래스 같은 대형 세단을 만들지 않고는 BMW의 미래는 없다고 판단했다. 그는 1977년 모험을 감행한다. S클래스 대항마인 7시리즈 출시다. BMW의 첫 대형 세단인 7시리즈에는 최초의 전자식 속도계, 속도 감지형 파워 스티어링, 전자식 사이드 미러, 체크 컨트롤(차량 상태감지 전자장치) 같은 최신 기술을 접목했다. 생산이 중단된 1986년까지 1세대 7시리즈는 28만 대 이상 판매되면서 BMW를 세계적인 고급차 반열에 올려놓았다. 전문경영인 퀸하임의 미래를 내다 본 혜안과 든든한 투자로 뒤를 받친 콴트 일가와의 합작품이 7시리즈였다.

퀸하임의 뒤를 이어 1993년 45세의 생산담당 사장인 베른트 피세츠리더가 회장에 올랐다. 뮌헨공대 출신으로 20년 넘게 BMW 연구개발과 생산을 담당했던 그는 또 다른 모험을 감행한다. 1970,80년대 두 번의 석유 파동 이후 BMW를 포함한 자동차 산업은 큰 타격을 입었다. 업계에서는 M&A를 통해 규모를 키워 생산원가를 절감하는 이른바 ‘글로벌 빅5가 아니면 살아남지 못한다’는 위기감이 팽배했다. 피세츠리더는 규모 확장을 위해 1994년 미니· 랜드로버를 보유한 영국 로버그룹을 인수했다. 1998년에는 최고급차의 대명사인 롤스로이스도 사들였다. 이렇게 M&A에만 7조원을 써버렸다. 문제는 합병 이후다. 영국과 독일의 문화 차이로 갈등이 커진데다 무리한 고용보장으로 로버그룹은 천문학적인 적자를 이어갔다.

그러자 콴트 가문이 다시 나섰다. BMW 이사회는 2001년 미니와 롤스로이스를 남겨 놓고 로버그룹을 단돈 1달러에 매각했다. 7년 동안 손실이 10조원이 넘었다. 10년 이상 피세츠리더 시대가 올 것이라는 예상을 뒤엎고 콴트 일가는 1999년 그를 경질한다. 후임 회장 자리는 3년간 공석이었다. 2002년 매킨지 컨설턴트를 경험한 재무·마케팅 전문가인 56세의 헬무트 판케가 회장을 이어받았다. 그 역시 뮌헨공대(물리학)를 나온 이공계 출신이다. 그는 BMW 역대 회장 가운데 가장 임기가 짧아 4년을 재임했다. 2006년 이사회 직전 판케는 “회장직을 더 맡고 싶다”고 콴트 일가에 의사를 전달해 언론에 화제가 됐다. 하지만 콴트 일가는 ‘60세 정년’을 이유로 경질했다.

BMW는 회사 경영을 총괄하는 경영이사회와 이들을 견제하고 보드 멤버와 회장 선임 권한을 가진 감독이사회가 분리돼 운영된다. 감독이사회는 주주 대표 10명, 사원과 노조 대표 10명 등 총 20명으로 구성돼 있다. 이 같은 인적 구성은 회사 경영의 객관성과 독립성, 그리고 사회적 대표성을 유지하는 오랜 독일식 경영의 전통에 따른 것이다. 독일의 상당수 대기업은 이와 비슷한 형태의 지배구조를 갖고 있다.

중앙대 이남석(경영학) 교수는 “노조 대표가 동수로 참가하는 BMW의 이사회 구조는 오너 중심의 한국 경영계 에서는 치욕스런 일처럼 느껴져 받아들일 수 없을 것”이라며 “노조와 사원을 같은 공동체로 인식하는 독일 경영의 특징이 BMW 지배구조에 잘 나타난다”고 분석했다.

콴트 가문은 일절 언론과 접촉하지 않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콴트 가문의 두 자녀 주자네와 슈테판은 대학을 졸업하고 BMW에 입사해 상당 기간 근무했다. 그러나 함께 근무한 직원들도 그들이 대주주 일가라는 것을 알지 못했 다고 전해진다. 회사에서는 가명을 쓰면서 평범하게 일반 직원들과 어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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